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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잊지 말아요 우리 역사 (2) 사군육진과 간도

 이번 하편에서는 사군육진과 ‘간도’ 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합니다. 이 둘의 공통점. 바로 영토, 국경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치열한 다툼 속에서 삼국시대를 이어가다가 6세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 이후 신라가 당군을 축출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고, 새로 들어선 나라 고려의 태조 왕건이 북진정책의 강화와 발해유민을 포용하면서 청천강~영흥만으로 국경선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발해의 넓은 영토를 모두 흡수하지는 못하였지요. 고려 중기에는 서희의 외교담판과 관련있는 강동6주를 획득하게 되고 영토는 조금 더 확장됩니다. 그리고 고려 후기, 공민왕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천리장성 이북까지 세력을 통합하여 13세기까지 유지된 국경선을 더 확장시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의 등장과 함께, 세종 때 압록강 유역에 사군, 두만강 유역에 육진을 개척함으로써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곳이 있습니다. 바로 ‘간도’입니다.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 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청 왕조가 발상지인 만주 일대에 한인이 이주하는 것에 대해 봉금령을 내렸으나 18세기 말 봉금령이 지켜지지 않게 됨으로써, 조선유민이 크게 증가하게 됩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1881년부터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 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피고, 1883년에는 간도에서의 조선인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외교 분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조선과 청은 숙종(1712) 때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에 의거하여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비가 세워진 이래 160여 년간 분쟁이 없었지만, 조선유민들이 대거 간도로 유입되자 청에서 걸고넘어진 것이지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때문에 ‘토문강’ 이 어디를 지칭하는지를 두고 조선은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에 있는 지류인 토문강(해란강)을 가리키므로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러나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에서 간도에 이범윤을 관리사로 파견하고, 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켜 조세를 거두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통감부에 간도 파출소를 설치해, 간도의 우리나라 영유를 인정하였습니다.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인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지만, 그마저도 1909년 일제에 의해 청은 간도를 일제는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푸순 탄광권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교환하면서, 민족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땅 간도는 잃어버린 땅이 되어 우리에게서 잊히게 됩니다. 

간도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처럼 간도는 어느덧 우리에게 먼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이를 잇는 가운데 땅이라는 뜻이 유래로이기도 한 간(間)도. 우리의 마음에서 사이를 잇지 못한 채 가운데에 떠 있는 섬 마냥 멀어지고 있는 간도. 문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통일 전에 간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어, 사이를 잇는 땅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참고

북한-중국의 국경획정 상황의 고찰 = The Boundary Demarcation between North Korea and China-노영돈

[조·중 국경선]간도를 개척한 조선 유민-북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