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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독립을 넘어 통일로 : 백범김구기념관 탐방기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여러분은 위와 같은 말을 남긴 분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앞두고 한 말입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는 백범김구기념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바쳤던 백범 김구 선생.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 상생기자단 5기 김경준 기자가 백범김구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20021022일에 개관한 백범김구기념관은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백범김구기념관 바로 옆에는 효창공원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효창공원은 해방 직후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독립투사들의 묘역과,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한 임정요인들의 묘역으로 항일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곳입니다. (이곳엔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기 위해 마련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범 선생도 서거 직후에 바로 이곳에 묻혔는데요, 백범김구기념관은 바로 이 효창공원 옆에 세워졌습니다.

백범김구기념관에 들어서면 정중앙에 김구 선생의 좌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총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1층 전시실은 백범이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전,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범 선생이 태어났던 1876년은 일본에 의해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었던 해로선생은 이러한 격동기에 태어나 스러져가는 조국의 현실을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미 민족주의자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21세 때는 젊은 혈기에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겠다며 일본인 밀정을 살해하는 치하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2층 전시실에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선생의 독립운동과 남북통일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안창호의 도움으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수반인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총지휘하게 되는데요, 명색이 정부의 수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일제의 감시와 중일전쟁의 발발로 중국 대륙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고, 그 와중에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장제스의 협조로 임시정부 정규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까지 그의 지난했던 독립투쟁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2층 전시실의 마지막 코너는 광복과 남북분단그리고 남북협상입니다. 1945815일 대한민국은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의 주둔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3.8선이 세워지고 한반도는 원치 않게 분단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선생은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자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운동 등 이제는 독립운동을 넘어 통일운동에 적극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9626일 김구 선생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고, 그는 끝내 통일 정부 수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가 서거한 지 꼭 1년이 지난 1950625,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을 공고히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한반도는 분단 상태로,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2층 전시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유물은 백범 선생이 서거할 때 입고 있었던 옷이었습니다.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흘린 핏자국이 혈흔이 되어 남아있는 그의 옷은 보존처리가 되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핏자국은 남북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통일운동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남북통일은 현실, 비현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반만 년을 함께 살아왔고, 외세의 침입 아래 함께 싸웠던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린다는 것을 그는 '정도'가 아닌 '사도'로 인식하고, 정도를 걷기 위해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이후 분단 60년. 남과 북이 떨어져 산 세월이 점점 길어지면서 우리들은 통일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지고, 심지어 통일을 반대하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통일 문제를 이익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말은 과연 이런 시각이 통일의 당위성을 살펴보는 올바른 관점인지 우리에게 성찰할 기회를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 친구들과 함께 백범김구기념관을 방문하여 통일을 향한 그의 염원을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으로 상생기자단 5기 김경준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