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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故김수환 추기경의 남다른 북한동포 사랑

 

 

북한동포와의 화합과 통일미래를 염원했던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여러분!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16일 선종(善終·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돌아가시면서도 ‘과분하게 평생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놓지 않으셨다는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의 ‘큰 어른’이었다. 김 추기경은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층과 종교를 넘나들며 아우르는 삶을 살았다.

 

 

 

 

김 추기경은 항상 북녘 동포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또한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했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주최한 ‘굶주리는 북녘동포를 생각하는 옥수수죽 만찬(1999년 6월 29일)’에 참석해 옥수수죽을 떠먹은 뒤 북녘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호소한 적도 있다. 이념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 하더라도 자동차로 한두시간이면 닿는 지척에서 한핏줄이 굶주림과 질병에 쓰러져가는 상황을 방치되는 것에 그는 마음 아파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북한에 쌀을 보내주는 것도 ‘퍼주기’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해 대량 아사(餓死)사태가 또 발생하고, 그로 인해 지금의 불안한 평화마저 깨진다면 후손들은 우리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平和)라는 글자가 가진 뜻을 이렇게 해석했다. 벼(禾), 즉 밥이 모든 입(口)에 골고루(平) 들어가는 것이 곧 ‘평화’라고 말이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통일이 되면 휠체어를 타고라도 그들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그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북녘동포를 위해 애썼던 김 추기경의 일생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리라 믿는다. 그는 자신하는 일이 작디작은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를 멈추지 않았다. 작은 구멍 사이로 새어나오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곧 세찬 물줄기가 되어 한반도를 평화로 넘실대게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아, 추기경은 가셨지만 그가 남긴 ‘함께 하는 사랑’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통일부 정책협력과 한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