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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대학생이 말하는 '천국은 없었다'

 




본 증언은 2010년 11월 26일, 북한인권청년학생연대에서 주최하는 '제 6기 대학생 북한 전문가 아카데미'에서 2003년 탈북한 K모씨가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기사화 하였습니다.


대학 새내기, 대한민국 새내기

한국 사회에 온지 어느덧 1 9개월. 나는 요즘 폭풍 과제 시즌’으로 인해, 새벽까지 공부 한답시고 도서관에 가서는 열심히 졸다가 오는, 여러분과 같은 학생이다. 먼저 강연에 앞서 발표자료가 없어 불성실하게 비춰질 수 있는 점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강연자료가 불필요하다. 그간에 겪었던 경험들은 나의 삶의 되어 그 모든 기억들이 뼛 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 중의 빨갱이집안

여러분들은 원하면 언제든 전화로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직접 찾아도 갈 수 있지만, 나는 연락조차하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과 친지들이 살아 있는 게 더 고통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그들이 죽고 없더라면 그리움 하나로 살 텐데, 그렇지 않아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장교출신으로, 우리집안은 빨갱이 중의 빨갱이집안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는 내게 참외대에서는 참외가 나와야 한다.’며 사상 교육을 시키셨다. 북한은 철저한 계급사회로,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생각 없이 성인이 되면 훌륭한 군인이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고는 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부터 그 과정을 설명 드리겠다.


8살 아이에게 들린 총성

북한에서는 선군 정치가 이뤄진다. ‘군복을 입는다.’ 라는 표현은 범 가죽을 입는다.’ 라는 표현으로도 대치할 수 있는데, 그만큼 군 권력을 가지면 북한에서 살아가는 데 모든 게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의 나라에서 8살 때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공개 처형이었다. 살던 동네에서 공개 처형이 시행된다는 소문에 어린 마음으로 친구들과 구경을 나갔다. 그러고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십여 명의 군인 앞엔 3명의 죄수들이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그들은 십자가가 아닌 일자 막대에 매달려 있었다. 2m 50cm가량 되는 높이에 매달린 그들의 눈과 입은 가려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체제에 반하는 말을 할 까봐 조치를 해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죄수들은 고문을 받은 뒤 반 죽음상태에서 총살을 당하지만 그 때의 그들은 멀쩡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둥되는 죄수들에게 8발 정도씩의 총탄이 박혔다. 귀가 멍멍했고, 주변이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로 자욱했다. (그 군인들은 모두 나이가 어렸는데, 군 당국은 교육을 시킨답시고 입대한 지 얼마 안된 군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이었다. 사격 실력이 숙련되지 않은 군인의 총을 맞은 죄수는 몸을 심하게 꿈틀거리며 괴로워 했다.) 사격 후 보안 요원은 죄수가 매달린 나무 막대에 다가가 낫으로 팔다리가 묶인 끈을 끊어버렸고, 죄수의 몸에선 목뼈와 척추와 신체의 각 관절들이 두두둑꺾이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하고 널부러졌다. 죄수들의 죄목은 사기죄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떤 사기를 쳤다고 사람을 저렇게 죽일까? 하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국가에 적대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먹을 것으로 보인 아들을 살해한 아버지

땅에 쓰러진 시체를 군인들이 마치 돼지를 대하듯 팔 다리를 잡고 질질 끌어 트럭에 싣고는 어딘가에 묻어버렸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행복하다. 죽은 뒤에 묻히기라도 하니까.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시절에 죽은 사람들은 묻히지도 못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전부 땅에 묻어줄 만한 힘도 없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시체를 대충 눈으로 덮어놓고는 했는데, 봄철 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간 아이들은 쌓인 눈의 언저리에 삐져나온 시체의 머리나 팔, 다리 등을 보고 기절해 나자빠지기도 했다.

함흥지방에선 인육을 먹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도덕이고 윤리고 전부 없어진다. 눈 앞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내 배를 채워줄 고깃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어느 마을에선 배를 하도 주려 정신이 이상해진 한 아버지가 어느 날 동네사람들에게 고기를 대접하겠다며 집에 초대를 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경악했다. 집에 누워 있는 고깃덩어리는 바로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굶주린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개로 보여 죽였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는 한 여성이 자신의 피를 뽑아 팔고, 또 다른 여성은 간을 팔았다고 한다. 96~97 250여 가구가 살던 마을에서는 100여 가구가 넘게 비었다. 극심한 배고픔에 쥐약을 먹고 자살한 사람도 있고 아무 풀이나 뜯어 먹다가 결국 독풀을 먹고 죽기도 했다. 사람이 먹지 못하면 몸에 잡병(합병증)이 생긴다. 소화계통부터 시작해 점점 온몸으로 병이 퍼진다. 제일 많이 앓는 병이 결핵이고 간경변증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주변에서 죽음을 하도 많이 겪다 보니 아주 예삿일이 되어 8살 때 처음 공개처형 목격 후 탈북하기 전까지 다섯 번을 더 봤지만 그땐 이미 담담하게 죽는가보다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됐다.


북한 탈출의 마중물, 남한 라디오 진행자의 상냥한 목소리

북한에서 모든 방송매체는 국가에 의해 통제 당한다. 채널도 조선중앙통신단 한 개에 고정되어 있다. 북한 행정 단위 최 말단인 마을에는 3-40여 세대를 관리하는 인민반장이라는 직위가 있다. 인민반장은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에 어느 집에 누가 없어졌다든가, 새로운 물건이 뭐가 들어왔다든가 하는 정보를 보고하게 끔 돼있다. 중국 등의 지역에서 들여온 라디오는 인민반장에 보고한 후 위에보내 한 채널만 나오도록 수리를 맡겨야 한다. 수리 후에는 접합 부분에 스티커를 붙이는데, 주파수를 다른 것도 잡히도록 수리하면 스티커를 떼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조치다. 북한에서는 가전제품이 귀하다. 여기 한국처럼 고장이 나지 않아도 바꾸고 고장이라도 살짝 나면 이때다 하고 바꾸는 게 아니다. 그래서 수리공의 수입이 괜찮은 편이다. 어렸을 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할 것도 마땅치 않고 심심해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 이것저것을 뜯어보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일본제 라디오를 맡기며 고쳐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수리하는 도중 조선말이긴 한데 좀 다른 말이 들렸다. 그건 다름 아닌 남조선의 라디오 방송이었다. 아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신기함과 놀라움도 잠시, 심장이 멎는 듯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이 일이 발각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집 3대가 망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송 듣기를 중단하기 힘들게 하는 유혹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사근사근, 간 녹이는 듯한남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였다. 북한의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는 금방이라도 무엇을 까부술 듯한 호전적인 목소리로 방송하는 데, 이와는 달리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뿌리치기 힘들만큼 부드러웠다.


남조선은 보관료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쌀이 넘친다는데

그렇게 라디오를 몰래 듣는 것이 생활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들었던 뉴스가 잊혀지지 않는다. 남조선에서는 벼농사의 작황이 하도 좋아 보관료가 오히려 부담이 되고 농부들은 쌀 값도 제대로 벌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아나운서는 국민 여러분, 제발 쌀 좀 먹읍시다. 농민들을 살립시다. 쌀 죽, 쌀국수라도 만들어 먹읍시다.”라고 했다. 이 멘트는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북한방송이 하도 거짓선전을 하는 것에 질려버려 남조선도 자기네들 체제선전을 하느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남조선의 실상에 대해 반신반의 하던 차에 방송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라디오를 듣다 보니 간이 커져 TV도 뜯어서 중국방송채널이 5~6개 잡히도록 손을 봤다. 어느 날 우리가 제일 잘 산다고 생각했던 중국인들이 한류 가수에 열광하는 장면을 보며, 그 때 한국에서 했던 방송은 진실이라고 믿게 됐다.


쌀 지원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세계에 대한 정보

햇볕정책은 확실히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고 해도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쌀이 아니라, 그 닫힌 세계와 비교할 수 있는 자유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다. 인권이란 게 있고, 권리란 것도 있으며, 내가 내 혼자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그 생각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 필요했다. 한국에 들어 오고 얼마 안됐을 때는 한국이 이렇게 잘 살고, 미국도 뒤에 있어 국방력도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데, 왜 지금껏 남한이 북한에 끌려 다닌 건지, 어째서 여태 통일을 하지 못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 답을 이제 얻었다. 남한은 북한을 너무 몰랐고, 북한은 남한을 너무 잘 알았다. 북한은 민주주의 국가의 취약점을 십분 활용해 끊임 없이 남한을 상대로 도발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런 북한의 실체도 깨닫지 못한 채 자유가 아닌 빵을 주어 북한을 개방하려고 시도한 것은 한참 잘못 판단한 것이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속마음

아버지 세대는 북한 정권이 세워진 후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세뇌 당했지만, 나는 탈북 당시 13살 이었고, 바깥 소식도 접해 정권의 선전이 얼마나 거짓 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환멸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와 TV뉴스를 함께 보다가 아나운서가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거짓말 하고 있네라고 내뱉고 말았다. 항상 속으로 생각해오던 것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며 날 더러 역적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도 모두 체제가 거짓이란 걸 다 알면서도 충성분자가 아닌 다른 삶을 꿈꿀 수도 없기 때문에 체제에 순응한다. 이게 바로 북한 사회의 모순이다. 따라서 북한 인민들에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일깨워주면 북한 정권은 바로 무너진다.


내 청춘을 김정일의 군대에 바칠 수 없다

남한 라디오 방송을 접하고 난 다음에도 나는 김일성에 대한 세뇌는 매우 강해서 그에 대해서는 악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김정일을 두고는 군대도 안 나온 사람이 어떻게 군 통수권자가 되나? 하며 욕을 했다. 그 불평이 커지고 커져, 14살 즈음 친구를 꼬셔 군대 가기 전에 남한에 갈 방법을 고심해봤다. 북한은 16살이 성년이 되는 나이인 동시에 남자는 군에 입대해 10-13년을 군에 복무하며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온 청춘을 김정일 정권에 바친다. 당시 강원도 철원에 근무하게 됐다. 키가 작아서 총이 나를 맸는지 내가 총을 맸는지 모를 정도였다. 입대 전 42kg 였던 몸무게는 입대 후 31kg까지 줄었다. 보직이 포병이었는데, 철강탄의 무게가 36kg, 파편탄의 무게가 42kg 이었으니 내 한 몸보다 무거운 포탄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못 먹고 배고프던 때였다. 근무를 하다가 뱀이나 생쥐를 보면 고깃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발견되기만 하면 냅다 잡아서 굽지도 않고 날 것으로 먹었다. 그렇게 제대로 먹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주워먹다 보니 군입대 1년 반 만에 영양실조와 그로 인한 잡병이 찾아왔다. 같이 입대한 신병 5명이 죽었다. 불과 전날 저녁까지 같이 고향 얘기하며 웃고 떠들던 동무들이 다음날 눈을 뜨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겨울에 죽으면 죽어서도 욕을 먹는다. 아무래도 날씨가 추우면 먹을 것이 더 없어 힘도 없는데 죽은 사람 묻어 줄 땅을 파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자살률이 높다는데 거기선 자살도 행복으로 보인다. 우리에겐 자살도 너무 배고프고 병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어도 그 밖의 이유는 없다. 굶주림 속에 군 복무를 하며 더 이상은 북한에 있을 수 없겠다고 확신하게 됐다.


자유 세계로의 탈출여정의 시작

12년 차이 나는 배 다른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업어서 키웠다. 아이를 볼 땐 아버지의 심정이었다. 동생은 입에 배고파, 밥 줘란 소리를 달고 살았다. 울며 떼쓰는 아이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던 어머니는 아이를 때리며 혼내는 수 밖 에 없었다. 탈북할 모든 계획을 세우고, 몇 일간 친구 집에서 묵고 오겠다는 거짓말을 뒤로 하고 집을 나오기 전 동생을 꽉 안았는데, 동생은 오빠! 사탕 사올 거지?” 라고 물으며 애교를 부렸다. 그런 동생 앞에 눈물이 쏟아 질 뻔 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러고는 논둑에서 같이 탈북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며 펑펑 울었다. 너무 추워서 손발이 붓고 터져 그 안에서 물이 질질 나오는데도 마음이 너무 아파 추위로 인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31kg 몸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 신의주부터 백두산까지 열흘이 걸렸다. 20032월 초 친구 3명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다 잠복근무병에 발각 돼 뒤에서 총알들이 날아왔다. 달리 피할 방법이 없었던 우리들은 각자 가득 쌓인 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추운 겨울 살에리는 눈 속의 추위 속에서 1시간 30분을 기다렸다. 당시에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발각되어 죽을 까봐.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못 참게 됐을 때, 일어나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찾아 중국 국경을 넘었다. 중국 땅을 밟자 살아남았다는 생각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중국 동쪽 변방에 서 북한을 바라봤을 땐 북한은 이미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잠시 있으니 갑자기 친구가 울부짖으며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는 바람에, 함께 울며 갖은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다그치다 주위가 하도 고요하니까 문득, 탯줄 묻은 고향과 부모님께 욕을 한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증오했지만 어쨌든 조국은 조국이었다.


지옥으로의 송환, 북송(北送)

중국에 간지 얼마 안 되어 공안에 잡혀 북송 당했다. 북한에 끌려가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하던 차에 북한에 들어서자 인자한’ 얼굴로 활짝 웃는 김일성 사진을 보니 지옥의 호랑이 같이 느껴지며 꿈이 아닌 현실인 것을 깨달았다.

중국에 잠시 체류하며 벌었던 돈을 북송 당할 것을 대비해 숨기는 연습을 했다. 나 같은 탈북자뿐 아니라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상업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북한에 들어올 때는 전부 돈을 숨겨서 들어온다. 북한에 들어올 때 군이 검사를 하는데, ‘구멍이란 구멍은전부 검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과 북한이 화폐 가치 는 72:1 였고, 중국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북한에 들어와 먹고 살 걱정은 당분간 안 해도 되는 시기였기에 더욱 숨기는 데 치열했다. 여자는 닭알(계란) 안에 중국 돈 500위안을 총알처럼 구겨 넣어 자궁에 집어넣고, 남자는 봉지에 돈을 돌돌 말아 넣고 그대로 삼켜버린다. 먹는 게 없어서 변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검열을 피할 수 있다.


단 두 가지의 선택지, 목숨을 건 탈출 혹은 자살

북송 되어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을 때, 족쇄가 모자라 탈북자 전체가 결박 되지는 않았다. 성인 남성만 결박 당했으며, 여성과 나이 어린 사람들은 운동화 끈으로만 묶인 채 군인들의 뒤를 따랐다. 북한의 기차는 전력 수급량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한다. 가다가도 멈춰서기를 반복하며, 기차에는 유리창도 다 깨지고 없는 실정이다. 난 여기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잡혀가 수용소에서 평생을 보내느니,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뛰어내리는 편이 나았다. 기차가 너무 빨리 달릴 때 뛰어내리면 내가 죽을 것이고, 천천히 달릴 때 뛰어내리면 보위부 요원들이 바로 뒤를 따라와 난 잡히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속도를 잘 가늠한 다음 묶여있던 끈을 풀고 달리는 기차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먹지 못해 근육이 사라진 지 오래인 다리를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얼마 못 가 멈춰선 기차에서 달려온 보위부 요원에 잡히고 말았다. 보위부 요원들은 나를 집단으로 구타하고 철로에 다리를 대고 엎드리게 해 무릎 관절이 뒤로 꺾이도록 군화 발로 밟아 버렸다.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 할 때 군인들은 날더러 어서 일어나 기차로 이동하라며 또 다시 구타 했고, 그래도 못 일어나는 나를 짐짝 끌 듯 끌고가 기차에 던져 버렸다.

탈북을 결심하기 전 내게 있던 선택지는 도망이 아니면 자살, 둘 중 하나였는데, 다리 한 쪽을 못쓰게 됐으니 이제는 자살 밖에 없었다. 손톱을 깎으려는 용도로 수용소에서 노동하는 중에 몰래 신발에 숨기고 들어와 돌에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못이 하나 있었다. 그 칼을 보니 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희망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손목에 대고 쭉 그었다. 동맥을 끊으니까 피가 위로 퐁퐁솟아 올랐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더라.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도 손에서 피가 철철 나니까 말려왔고 결국 죽지 못했다. 이 때 마음을 새롭게 먹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보자고.

다시 한 번 감행한 탈출에 성공해 중국을 거쳐 베트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경 끝에 도착한 베트남에서도 기대했던 삶은 찾기 어려웠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버텨왔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멀기만 했다. 오히려 이런 배신감에 더욱 비장해진 내겐 끝까지 살아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중국으로 돌아와 아파트 건설공장에서 6개월간 욕을 들어가며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했다. 설움 가득한 귀동냥으로 중국말을 배우며 이번에는 러시아로 넘어갔다가 경찰에 잡혔다. 감옥에 구류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머리를 굴렸다. UN 인권위와 대한민국 정부, 러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재판 공지로 날라온 종이를 간직해뒀다가 편지지로 쓰기로 했으나 펜을 전혀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면도칼로 손가락 하나 하나를 그어 피를 내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가 처했던 상황을 썼다. 손가락 하나에는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아, 열 손가락을 전부 그어야 했고 편지를 다 쓰고 나서는 어깨가 저려왔다. 재판 날, 러시아는 대국이며, 러시아에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찾아 왔는데 당신들이 나를 북송 하면 러시아의 국제적 이미지 실추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여러 쇼를 펼쳤다. 결국 나는 러시아를 탈북 경로의 마지막으로 찍고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다.


당부하는 말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다. 대북 쌀 지원은 인민들을 몇 일 더 살려 줄뿐, 영원히 그렇게 억압과 자유의 부재 속에서 살도록, 그 노예의 생활을 고착화 시킬 뿐이다. 북한 인민들에게도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알게 해달라.북한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북한 탈출기를 듣고..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이 있던 기자는 문제 해결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 통일부 상생기자단에 지원했고, 올해 5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 껏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북한 관련 행사를 따라다니고 관련자들을 만났지만 오늘과 같이 인권 실태에 대해 생생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탈북 경로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제작 되어 세상에 알려졌지만, 영상으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육성으로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매일 얼굴을 보는 가족,친구나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자유와 인권 이란 개념은 언제나,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마음속에 일부러 떠올려가며 감사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북한 정권이 세워진 지 60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에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자유와 인권이란 가치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너무나도 원하고 갈망하는 귀한 것이었죠. (심지어 자유가 무엇이고 인권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

여러분들은 아마 하시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나 지치고 힘들 떄 '죽고싶다', '힘들어서 죽겠다' 등의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번 사용해보셨을 겁니다. 기자도 지금보다 나이가 어릴 땐 그랬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탈북 과정을 통해 강연을 하신 탈북자 분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고는 지난 시간 동안 제 삶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아픔의 시간들이 너무나도 별 것 아닌 하찮은 순간들일 뿐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와같은 '죽겠다'는 감정토로는 탈북자들의 삶에 비춰봤을 때 지나치게 기만적인 행위라고 여겨 다시는 입 밖에 낼 수도 없게 됐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최근 통일 준비의 일환으로 통일 재원 마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앞으로는 통일 재원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 때, 통일이 되면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뭐하러 통일까지 해서 먹여 살려야 하냐고'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통일비용은 분명히 국민에게 일정부분 몫이 돌아오겠지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금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사실 입니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누리며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기사를 마칩니다.

 

통일부 상생기자단 3기

정윤재 기자 jgs1012@hotmail.com

강세미 기자 seminsu88@naver.com


 



해당 기사는 2010/12/7, 다음 뷰 [사회]부문 베스트로 선정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유익한 기사로 찾아오는 통일 미래의 꿈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