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를 아시나요?


통일벼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자체 개발된 벼 품종입니다. '통일미(統一米)'라고도 합니다. 통일미는 서울대학교 생물학자였던 허문회 교수를 필두로 한 연구진이 개발한, 당시의 일반종보다 수확량이 30%나 높은 개량종입니다.


서울대학교 허문회 교수(1927~2010)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당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식량사정 또한 몹시 좋지 못했습니다. 전년도에 생산한 쌀이 바닥나고, 이듬해 봄에 보리가 나기 전까지가 고비라는 뜻의 '보릿고개'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어떻게든 식량난을 해결하고, 동시에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잘 자라고 쌀이 많이 나는 벼를 개발하는 것으로 목표를 잡고, 서울대학교 생물학자인 허문회 교수에게 지시를 합니다.


허문회 교수가 벼 품종을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은 몹시 열악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벼는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쌀과 품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쌀의 세부적인 품종은 세계적으로 50,000여 종이 넘는데, 크게 '자포니카 쌀'과 '인디카 쌀'로 구분됩니다. 인디카 쌀은 자포니카 쌀에 비해 생산량이 좋으며, 낱알의 모양이 길쭉하며, 찰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밥그릇을 손에 들고 젓가락을 이용해 마시는 방식으로 먹습니다. 중국 중남부 이하 지역에서는 인디카 쌀을 볼 수 있습니다. 자포니카 쌀은 인디카 쌀에 비해 더 찰지며, 윤기가 납니다. 



▲인디카 쌀(왼쪽), 자포니카 쌀(오른쪽)



자포니카 쌀은 한반도, 일본, 중국 북부에서만 재배되는 품종입니다. 세계적으로 10% 정도를 차지합니다. 나머지 90%는 '인디카 쌀'로, 태국, 필리핀, 베트남, 인도, 서남아시아, 유럽 등에서 재배됩니다. 우리가 흔이 '맛 없는 월남미'라고 하는 이유도, 베트남에서 식용으로 쓰는 쌀이 인디카 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더 많은 빈곤국이 인디카 쌀을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선진국들은 자포니카 쌀이 아닌 인디카 쌀을 개량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을 구가하고 있던 일본이 자포니카 쌀을 개량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문회 교수는 말 그대로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맨 땅에 헤딩을 하는 식으로 연구를 해야 했습니다.


허문회 교수는 가장 먼저 중앙정보부의 도움으로 이집트에서 자포니카 벼의 일종인 '나다(Nahda)'라는 쌀을 불법밀수(!)했습니다. 나다 품종은 이집트에서 생산력을 높이는 데 큰 성공을 거둔 벼 품종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자기 이름의 '희'자를 따서 '희농1호'라는 이름까지 붙였지만, 희농1호는 실패하고 맙니다. 이집트의 기후와 한반도의 기후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허문회 교수는 연구의 방향을 다시 잡습니다. 자포니카 종과 인디카 종을 섞어, 더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는 돌연변이 종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포니카 종과 인디카 종의 잡종은 이미 일본에서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는데, 둘의 상호교배는 불임이라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허문회 교수는 당시 미국과 일본의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상호교배하여 불임이 아닌 돌연변이 종자가 생기면, 이를 다시 기존의 벼와 교배하는 방식의 연구를 끊임없이 시도했습니다.


ⓒ동아사이언스


수 백 종의 벼를 교배시키는 연구를 몇 년에 걸쳐 진행한 결과, 키가 작고 이삭이 크고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벼를 발견했습니다. 기존 자포니카 쌀에 비해 생산량이 30%나 높은 벼가 새로 개발된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벼'입니다. 통일벼의 개발은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이미 '인디카와 자포니카는 상호교배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연구가 마무리되었던 것을 뒤엎은 것은 물론, 벼의 줄기 길이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위치까지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이 좋은 벼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는 몹시 들떴습니다. 그는 이 벼에게 '통일벼'라는 거창한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박정희의 가장 큰 기조가 '선건설, 후통일'이었으니, 국가의 식량을 책임지는 벼가 결국 '통일'의 밑거름이라는 식으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통일벼의 쇠락


하지만 통일벼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생산성은 좋았지만, 너무 맛이 없었던 것입니다. 통일벼는 인디카 쌀의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월남미와 비슷한 식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통일벼가 인기가 없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박정희는 무기명으로 이루어진 시식회에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적고 통일벼가 맛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밥이 맛있다고 해서 진짜 밥이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민들은 맛없는 통일벼를 재배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에 박정희는 농가별로 통일벼 생산량을 할당하고, 다른 쌀을 재배하는 것을 규제하는 방법까지 동원합니다. 여기에 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자, 박정희는 쌀값을 억지로 낮춰 나머지 이윤으로 공업을 육성하는 공업중심정책을 펼칩니다.


하지만 맛 없는 통일벼의 시장가격은 일반 쌀의 반값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통일벼는 지속적인 개량으로 자포니카 쌀과 같은 찰기와 윤기를 갖추게 되었지만, 한 번 형성된 시장의 선입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통일벼가 아닌 '아키바레(秋晴)'라는 종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것이 시장에서 훨씬 더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자포니카 쌀', '아키바레'와 같이 일본식의 이름이 붙은 것은, 20세기 초반 벼 연구를 일본이 선두에서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통일벼는 심지어 소도 싫어해, 소 여물로도 쓸 수 없었습니다. 통일벼는 생육기간이 들어 보리와 이모작이 불가능했고, 병충해에 무조건 항생제를 사용하는 바람에 점점 약한 품종이 되어갔습니다. 1980년에 이상 저온 현상이 생겨 전국적인 흉년이 들었는데, 통일벼 품종이 일반 품종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농민들은 통일벼를 선호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는 시장에서 통일벼를 퇴출시키고 맙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막 시작하던 단계로, 더 이상 통일벼가 없어도 식량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는 시점이었습니다.


다만 통일벼를 통해 국민들이 한 가지 반겼던 것이 있다면, 통일벼 생산으로 쌀 생산량이 늘어나자 막걸리 제조가 가능해 진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쌀이 막걸리로 사용되는 것을 1964년에 금지했는데, 이를 1977년에 다시 허가합니다. 이는 당해 10대 뉴스에 들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남한의 통일벼 생산량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 또한 북한 지역에서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을 높이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품종개량 등 다른 방법을 통한 것이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다시피 한 약탈농법이었습니다. 80년대 초반 북한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세계 최고였지만, 그 바로 이후의 생산량은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참고자료]

[네이버 캐스트 생물산책] "통일벼"

[한겨레] "통일벼로 통일하고 유신벼로 유신하자"

[한겨레 사이언스 온] "그 시절 통일벼의 녹색혁명, 박정희의 농업정책"


추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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