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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분단될 수 있었다?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분단될 수 있었다고?


한반도 분단은 아직까지 남북의 갈등과 동북아시아의 갈등을 야기하며, 평화적인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과 추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세계는, 소련과 미국을 필두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그 최전선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분단이 되었다가 통일이 된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입니다. 독일의 패망을 목격한 연합국의 가장 큰 고민은, 독일이 다시 국가적으로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다시 힘을 모아 2차대전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분할관리하기로 결정합니다. 동독 지역은 소련이 관리하고, 서독 지역을 다시 북부, 남부, 서부로 나누어 각각을 영국, 미국, 프랑스가 관리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품어볼 수 있습니다. 독일은 2차대전의 추축국에 속했던 국가로, 연합국은 독일에 전쟁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 독일을 동서로 분단시켰습니다. 그런데 한반도는 추축국에 속하지도, 2차대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은 식민지 국가일 뿐이었습니다. 정작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일본인데, 왜 분단된 것은 일본열도가 아니라 한반도였을까요?


소비에트연방, 일본 진출을 계획하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가속화되고, 미국의 승리가 예측되었음에도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전쟁은 질질 끌리고만 있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참전을 요구하고, 소련은 미국의 요구를 승낙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전합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의 일본군을 신속하게 몰아낸 후, 일본 열도로 상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5년 8월 24일, 장거리 미사일을 홋카이도에 발사한다. 오전 5시에 2개 연대 규모의 부대를 선발대로 투입하고, 2시간 후에 2개 사단 규모의 부대를 본대로 투입한다. 며칠 안에 홋카이도 북부를 전부 점령한다."


이것이 실제 소련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이반 유마셰프가 세웠던 간략한 일본 침공의 초반 계획입니다. 포츠담 회담 결과 소련은 일본 열도로 직접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태평양 부대는 침공 준비를 마치고, 잠수함들은 홋카이도 근처를 정찰하고 있었으며, 일본 국적의 배 몇 척을 격침시키는 등 침공 직전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스탈린의 최종 공격 명령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홋카이도 전역을 그러던 중인 8월 15일 일본은 급작스럽게 항복을 선언해버립니다. 그리고 스탈린의 일본 침공 계획은 흐지부지 사라집니다.

(관련기사: <Foreign Policy> "Did Hiroshima Save Japan From Soviet Occupation?")



전쟁이 차츰 소강상태에 이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의 승리가 사실상 예상되었던 1945년 당시, 미국은 일본을 4분할하여 북부는 소련, 동부는 미국, 남부는 중국, 서부는 영국이 관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소련의 홋카이도 침공을 사실상 묵인한 것입니다. 소련이 홋카이도 점령 계획을 세웠듯 미국도 혼슈 점령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극동 최전방부대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군은 11월 정도나 되어서야 일본열도 남단의 큐슈나 제주도에 상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에 끈질기게 항전하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과 9일 이후에도 일본이 계속 항전하였습니다. 미군의 참전 요청을 받은 소련군은 계속 한반도 남쪽으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전쟁이 조만간 끝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10~11일 경에 소련에게 일본 항복 후 한반도 관리 기준으로 38선을 제의합니다. 당시 미국 군부는 소련이 이를 당연히 거부하고 계속 남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소련은 이를 승낙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당시 소련 간부는 "미국이 38도선까지 양보해서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전후 상호관계가 갈등관계로 치닫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적어도 2차대전 직후에는 서로 갈등을 빚기 싫었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항복 시점이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가설이 또 하나 있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시점에 따라 한반도 전체가 자본주의 국가가 되거나, 혹은 전체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거나, 남북이 분단되는 경우의 수가 나뉘어져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분단되는 것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였다는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해방 직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얼마나 급박하게 전개되었는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련은 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독일이 패망하고 2차 대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던 1945년 무렵에는 전쟁 이후의 세계 판도가 계산되고 있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전쟁으로 유럽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 결과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예고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소련은 전쟁 후 미국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컨대 소련의 세력을 일본까지 넓혀놓는다면, 언젠가 아시아에서 미국을 상대하는데 훨씬 용이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1945년 7월 25일 포츠담 회담이 열리고 있을 무렵 당시 이미 38선이 논의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소련이 38선 이남 지역 점령을 미국에 양보하는 대신 홋카이도 상륙 권한을 얻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당시 미국엔 원자폭탄이 있었으나 소련엔 없었고, 이러한 전력차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소련이 미국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양보했다는 것입니다.(소련은 원자폭탄을 1949년에 개발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처음 투하된 8월 6일에서 소련 첫 진격일인 8월 8일 사이에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이 승전국이 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역은 미국의 관할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고 친미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조금 더 펼쳐보자면,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난 장제스의 국민당이 힘을 더 얻어 본토 수복론이 힘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일본의 항복이 15일 이후로 늦었다면, 소련군은 계속 한반도 남쪽으로 남하하였을 것이고, 한반도 전역은 소련의 관할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고 친소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련은 본래의 계획대로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까지 진출하여, 홋카이도의 일부는 러시아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이 두 번의 원자폭탄을 맞고도 항복하지 않다가,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1주일이 지난 15일에 갑자기 항복을 발표한 것은 소련의 홋카이도 상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세력이 일본에 가까워지면 일본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오랜 역사를 지닌 일본 왕실이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태평양은 지금과 같은 '미국의 호수'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간 전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일본이 미국 세력권 안에 있으면 태평양은 미국의 호수가 되지만, 일본이 대륙의 사회주의권으로 들어가면 태평양은 붉은 호수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옆에 있던 한반도가 분단되어버렸습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