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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2)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1)"에서 계속됩니다)


분단을 피할 수 없었을까?


미국이 처음 긋고 소련이 합의한 38도선은, 처음에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 관리를 위한 경계선, 즉 일본군의 무장해제 관리를 위한 선이었을 뿐 분단을 의미하는 선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가 끝난 뒤에,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한반도 신탁통치 논의는 당연히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꼭 남북의 분단을 의미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8년 12월에 열렸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도 38선을 유지한다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런 흐름은 왜 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을까요? 우리 민족은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는 충칭에 거처를 두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북 주민 대표를 구성원으로 한 한반도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고,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이 새로운 임시정부를 통해 한반도를 5년 간 신탁통치한 후, 한반도를 독립시킬 계획이었습니다.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한반도 밖에서 활동하던 민족해방단체나 독립군 등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인하지도 않았고, 한반도와 관련있는 단체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어떤 단체도 한반도 사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고 흩어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승전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에 대해 논의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패전국에 불과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까지 크게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경우의 수도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미국, UN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달리 민족통일국가를 주장한 김구나 김규식과 같은 중도 세력이 집권했다면 남북 통일은 수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도 좌파, 중도 우파 등 중도 세력은 힘을 합치지도 못했습니다. 그나마 좌우가 함께 이끌며 중심을 잡고 있던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였지만, 해방 후 반탁 찬탁 논쟁 가운데 신탁통치에 찬성한 좌익 세력이 임정에서 대거 이탈하면서 큰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왼쪽에는 우익 세력이 "신탁통치절대반대"를, 오른쪽에는 좌익 세력이 "삼상결정절대지지"를 주장하며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우익은 또다시 타국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좌익은 현실적인 자주독립 준비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어떻게 통일해야 하는가


'왜 통일해야 하는가', '왜 분단이 되었는가'라는 두 가지의 큰 질문을 뒤로하고, 이제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어떻게 통일해야 하는가"가 남았습니다. 저자는 가장 먼저, "전쟁통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선언처럼 이야기합니다.


남북전쟁은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하여 6.25전쟁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상 국제적 성격이 짙고, 피하기도 어려웠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조금 더 합당합니다. 특히 한반도 전체가 자본주의 진영이 되면 사회주의 세력 입장에서는 만주 지방이 위험해지고,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 진영이 되면 자본주의 세력 입장에서는 일본을 포함해 태평양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한국전쟁에 수많은 외국군이 참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이승만의 제1공화국 시절 남한이 끊임없이 북진을 외쳤음에도 실행되지 못한 것은 당시 북한에 비해 국력의 열세에 기인한 탓도 있지만, 국제사회가 이를 돕지 않았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국전쟁에 파견된 프랑스 군인들. 한국전쟁은 수많은 외국군이 파견된, 사실상의 국제전이었습니다. 강대국들은 한국전쟁이 3차대전으로 번지지 않도록 크게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미군의 만주 공격 요청을 미 정부에서 거부한 일입니다. ⓒKorea Joongang Daily


전쟁통일론이 힘을 잃은 이후에는 평화통일론이 부상했습니다. 그 시작점은 1960년의 4.19혁명이었습니다. 4.19 이후에는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박정희 중심의 민주공화당 세력조차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즉, 한국전쟁을 통한 전쟁통일의 실패 이후 평화통일론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흡수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남한이 주장한 연합제나 북한이 주장한 연방제는 비슷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는, 상호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통일론입니다.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가 대립하는 동북아 대분단과, 한국전쟁의 국제전적 성격 때문에 전쟁통일이 불가능한 이치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형식으로든 흡수통일은 어렵다고 봐야합니다.


가령 독일은 흡수통일의 하나의 사례였는데,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이전부터 국경을 맞댄 체코슬로바키아나 오스트리아 등으로 대거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주민은 대량탈출이 어려운데다, 중국은 탈북민을 난민으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거나 북중관계가 가까워질 때마다 중국은 탈북민을 북송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독일통일 후 동서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을 "웨씨(서쪽사람)",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을 "오씨(동쪽사람)"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림 속 엄마가 "웨씨는 돌아가라"고 글을 쓰자, 꼬마아이가 "엄마, 웨씨가 뭐예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흡수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에 일어날 남북 주민 간 우열 분단도 걱정해야 합니다. 저자는 독일에서 한 학자를 만나서, 독일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난날의 한일합방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서독 출신 주민을 내지인(일본인)에, 동독 출신 주민을 외지인(조선인)에 비교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여러 글들을 통해서 독일통일의 휴유증을 알게된 저자는, 우리는 그런 식의 흡수통일이 될 수도 없겠지만 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고 말합니다.


한편 저자는 김영삼 정권 당시 정상회담 합의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기 이전 남북은 최초의 정상회담을 기획하며 한창 분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남북정상회담 기획은 애초에 남북이 자주적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1차 북핵∙미사일 문제로 미국이 북한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실제로 미국이 북한을 타격할 계획을 백악관에서 논의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카터가 이를 미연에 막기 위해 방북해하여 주선한 것이 남북정상회담이었습니다. 남북의 자발적 참여가 바탕이 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정상회담을 할 정도로 개선되었던 남북관계는 김일성 사후 조문 문제를 두고 급속히 냉각되었으며, 그 결과 동해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96년 북한 잠수함이 동해로 침투하여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조선일보


이러한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뒤이어 북한의 일방적인 핵폐기 주장이나 남한의 일방적인 주한미군철수 주장을 거론하며, 어느 한 진영에 치우친 통일 논의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합니다. 즉, 통일을 향한 길은 일방향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직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945년 해방 직후 38선이 그어지고 7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 세계에 유례없는 '통일부'가 있는 나라,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남북에게 통일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통일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해답을 찾는 일도 어려워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때이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는 강만길 교수의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를 읽으며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