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통일부기자단 9기 황주룡 기자입니다. 오늘은 지난 기사에 이어 동독 붕괴 후의 독일 통일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기사를 이어가기에 앞서, 사실 이번 기사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과거 청산 문제이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 및 사회통합 과정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저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후반 독일로 떠나 볼까요? 


▲ 동독 월요시위 현장 , 동독 월요시위는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키는 데에 큰 몫을 하였습니다. (출처 : bing)


89년 10월 7일 동독 창립 40주년 기념 행사일에는 동독 정부군과 시위대의 대결 국면이 최고조로 달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은 창립 행사에 반대하면서 평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죠.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행사 방문에 맞춰 강한 개역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고르바초프도 이를 보고 동독 호네커 서기장에게 직설적으로 불편함을 표현했습니다. 결국 동독 경찰과 슈타지의 월요시위 진압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평화 시위대는 동독 지도부와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호네커는 89년 10월 17일 국가 수반 겸 당 서기장 직에서 물러나고, 11월 9일 동독의 여행관계법이 제정됩니다. 서독으로의 상시적인 자유여행을 보장하는 규정이 통과되어 시위대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  89년 10월 17일, 샤보브스키가 여행관계법 효력발생 시점에 대한 폭탄발언(?)을 하는 장면 (출처 : bing)


 이 날 저녁 동독의 샤보브스키 정치국원이 참석한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한 이탈리아 기자가 샤보브스키에게 여행관계법 효력발생 시점이 언제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샤보브스키는 "지금 당장 유효하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이 기자회견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이날 밤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물밀 듯이 몰려 나왔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 검문소 주변으로 몰려 왔지만 당시 동독 국경수비대는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한 상태라 출입 허가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통행 허가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동독 주민들은 문을 열라고 외쳤으며, 자정을 조금 앞둔 시점에서 검문소 담당자들이 통로를 개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 향했습닏.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독 분단 종말의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어 독일은 점점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89년 말 과도내각 책임자 역할을 했던 한스 모드로. (출처 : bing)


 89년 12월 1일, 동독 인민회의는 동독 헌법에서 사통당(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치요구 조항을 삭제하였습니다. 12월 3일에는 동독 사통당 중앙위원회 및 정치국 인사 모두가 총 사퇴하였습니다. 12월 6일이 되면 국가수반이었던 에곤 크렌츠도 사퇴하게 됩니다. 후임자는 민주사회당(이하 민사당)으로 개명한 사회주의 정당의 한스 모드로로 정해졌지만, 자유총선이 실시되기 전까지에 한하는 과도내각 책임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과거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이 합하여 만들어진 사통당의 통치 하에 문어발식으로 주민들을 감시해온 슈타지는 벌법 공작 해위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슈타지 요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련 서류들을 파기하였습니다.


▲ 슈타지 베를린 본부. (출처 : bing)


하지만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동독 여러 도시의 시민들이 슈타지 지역본부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90년 1월 15일 주민들은 동 베를린 리히텐베르크의 슈타지 본부 진입에 성공합니다. 수많은 시위대들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책임을!', '비폭력!' 등의 구호를 위치며 슈타지 본부에 진입하여 오랜 시간 숨겨 왔던 슈타지의 문서를 공개하게 됩니다. 당시 서독 연방 총리였던 헬무트 콜은 책임 소재가 명확하지 않고 훼손된 문서가 많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발로, 그 뜻에 따라 슈타지의 문서들이 공개됩니다. 그리고 시민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동독 공산정권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 시작됩니다.


▲ 90년 5월 18일 동서독이 『화폐, 경제, 사회통합 조약』을 체결하는 장면. (출처 : bing)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18일이 되면 동독에서도 첫 총선이 실시됩니다. 선거 결과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을 중심으로 한 '독일연합'이 승리하게 됩니다. 독일연합이 승리한 데에는 동독 주민들이 빠른 통일을 염원한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서독은 화폐·경제·사회 분야의 통합 노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동서독은 경제학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독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주요 부문의 동서독 화폐 환율을 1:1로 맞춥니다. 그리고 동독 지역에 신연방주를 설치하고 연방주의 재정조정을 통해, 동서독 간의 경제력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도 실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경제상황은 악화되어 많은 동독 주민들은 가능한 한 빠른 통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8월 31일 동서독은 '독일 통일조약'을 체결합니다.


▲ 통일독일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2+4 조약을 모식화한다면 이런 모습일까요? (출처 : google)


 하지만 독일의 통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4대 전승국의 동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서독 콜 정부의 준수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독일 통일에 대한 전승국의 승인을 얻어 냅니다. 콜은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만나서 통일 독일의 독주를 우려하는 소련의 우려를 잠재웁니다. 그리고 콜은 당시 독일 통일에 대해 철저한 반대 입장을 밝혔던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미온한 입장을 내비쳣던 영국의 대처 수상에게도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통일 독일이 나토에 가입하는 동시에 독일이 핵무기 및 화학, 생물무기를 가지지 않고 군 병력을 37만명을 감축시킨다는 조건을 겁니다. 이에 4대 전승국은 통일독일의 완전한 주권 회복에 대해 승인합니다. 마침내 9월 12일 독일의 '2+4 조약'이 체결되어 전승국의 승인도 받아 내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됩니다. 이후 12월 통일독일 총선에서 헬무트 콜을 중심으로 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압승하여 콜은 통일독일의 첫 번째 연방총리가 됩니다. 콜 총리는 연정을 통해 처음부터 내각에 동독 출신 장관들을 기용하였는데, 새롭게 기용된 장관 중에는 훗날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현 메르켈 총리도 있었습니다.


 오늘 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기사에는 통일독일이 과거 역사 청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알아보면서 기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 시리즈로 기사 보기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①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②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③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④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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