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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① : 제1차 북핵위기


 안녕하세요, 제9기 통일부기자단의 황주룡 기자입니다. 이번에는 국내외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고 있는 북핵 문제를 다뤄 보고자 합니다. 사실 북한과의 무력 충돌, 그리고 북핵 문제는 예전부터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작년부터 올해 초 사이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9월 9일 북한에서 5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UN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2321호가 나온 상태입니다.


 사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북핵 문제는 최근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북핵 문제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을까요? 우선 북핵 문제를 한 기사에 모두 다루기에는 분량의 한계가 있으므로, 오늘은 <제1차 북핵위기>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 99년 4월 20일 이병태(오른쪽) 국방장관과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이 한국 국방부 소회의실에서

1차 북핵위기 대응 원칙을 논의하는 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는 장면이다. <한국일보 자료>


 북한의 핵 문제는 90년대 초의 북핵위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보통 북핵 위기를 이야기할 때에는 제1차, 2차위기로 구분합니다. 먼저 1차 북핵위기를 다뤄 보겠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최초로 국제사회에 이슈로 대두되던 사건입니다.


 원래 북한 영변에는 약 5Mw급의 원전이 있었습니다. 60년대 당시 구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실험용 원자로를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핵 물질 관리능력을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1989년 9월 15일 프랑스의 상업위성이 촬영한 북한의 비밀 핵시설 사진이 공개됩니다. 북한이 비밀스럽게 핵 관련 활동 및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에 공개적으로 노출된 것입니다.  80년대 후반 당시는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냉전이 종식될 무렵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국제사회의 경고 및 외교적인 압력을 받게 되는데, 결국 92년 1월 7일 북한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핵 사찰을 수용하고,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 때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국제사회의 이목 집중과 압력에 대해 지금보다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약 1년 정도가 지난 93년 2월 16일이 되면, 북한은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절합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핵 사찰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일반사찰과 특별사찰이 있는데, 일반사찰은 당국으로부터 보고된 내용에 기초한 사찰을 의미하며, 특별사찰은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곳에 직접 사찰단을 보내 사찰을 실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IAEA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특별사찰 요구를 하였으나, 북한은 군사 비밀시설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특별사찰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약 한 달 뒤 3월 12일이 되면, NPT를 탈퇴하겠다는 서한을 UN 안보리에 제출합니다. NPT(핵확산금지조약) 제10조에는 '해당 조약이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생각될 때는 탈퇴할 수 있다' 와 같은 탈퇴 조항이 있는데, 북한은 이 조항에 근거하여 NPT를 탈퇴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서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특별사찰 대상으로 지목된 지역에 북한이 감추고 싶어 하는 핵 관련 시설이나 활동, 물질 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 IAEA와 UN 안보리는 93년 5월 11일, 대북 제재 결의안 825호를 채택합니다. IAEA는 사찰 중에 독자적인 힘으로 사찰 대상을 통제하기 힘들 때, 사안을 UN 안보리에 회부할 수 있습니다. UN 안보리에서는 IAEA에 의해 회부된 사안을 의논한 다음,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이죠.


 안보리의 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에 대해 NPT 조약 탈퇴 철회를 요구하고, 안전협정 이행 및 특별사찰을 받아 들이라는 내용을 촉구하는 형태입니다. 대북 결의안 825호는 UN 안보리가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제재를 결정한 최초의 결정입니다. 그 이후에 북한이 핵 관련 행동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결의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약 1년 정도가 지난 후 94년 3월 19일이 되면 남북 간의 부총리급 회담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서 북측 대표가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면서, UN의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  94년 6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일성 주석이 유람선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당시 남북 간의 긴장 상황을 무마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은 바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입니다. 카터 대통령은 94년 6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김영삼 정부도 카터와 함께 전쟁을 막기 위해 상당히 많은 애를 쓴 모양입니다. 카터와 김영삼 정부의 노력의 결과로, 94년 말 역사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핵 위기는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승계받는 과정에서 체제의 안정성이 필요했고, 또 당시의 새로운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안정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김정일은 미국과의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그 결과 94년 10월에 북미 간의 제네바합의가 체결됩니다.


 북한은 당시 플루토늄을 재처리해서 핵물질을 가공하고 있었는데, 제네바합의를 통해서 이 핵시설을 동결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대신 미국과 주변 국가들이 북한의 전기 에너지 결핍을 보충해 주기 위해 경수로 두 개를 지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경수로의 건설에는 약 10년이 소요되는데, 미국은 10년 동안 매 달 50만 톤의 중유를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위의 내용왁 같이 제네바합의는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인센티브를 통해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이 때 경수로 건설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기구는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입니다. KEDO의 회원국은 한국, 미국, 일본 등의 여러 국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때 경수로의 건설 비용 문제를 놓고,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비용의 약 70% 가량을 한국이 부담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북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에 북핵 문제가 불거지는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계속 미국을 협상 대상국으로 지목하였던 점도 있고, 실제로 제네바 합의의 경우도 당사자인 남북이 아니라 북미 간에 체결된 조약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제네바협의, KEDO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사실상의 주도권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최근에도 한국은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 부분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쥘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큰 숙제라고 할 수 있겠죠?


 다음 기사는 2차 북핵위기부터 이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시리즈로 기사 보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① : 제1차 북핵위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② : 제2차 북핵위기

역사의 흐름으로 알아보는 북핵 문제 ③ : 제1차~5차 핵실험



<참고자료>

왕선택, 『북핵위기 20년 또는 60년 : 왕선택 기자의 북핵연표 해설』, 선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