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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8.15광복특집] 북한의 여성 독립운동가

통일 미래의 꿈 독자여러분 안녕하세요

 다가오는 2016815일은 광복 71주년입니다. 1945년 대한 독립이 오기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이 뒷따랐습니다. 보통, 독립운동가라 하면 주로 남성 독립운동가를 떠올리실텐데요, 남성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분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독립운동 참여자 10만여 명 중 여성 독립운동 참여자는 2%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여성 독립 유공자는 자료 부족, 기준 미달, 행적 미상 등의 이유로 포함되지 못하여 포상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는 전체 포상자 1만4197명의 1.86%에 불과한 265명이라고 합니다. 다가오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에 힘쓴 여성독립운동가, 그 중에서도 북한의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임산부, 일제 통치 기관을 무력으로 응징하다 - 안경신 의사(1888.7.22 - ?)

 먼저 소개해드릴 여성 독립운동가는 평안남도 대동출신의 안경신 의사입니다. 안경신 의사는 평화적인 외교보다는 무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제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안경신 의사는 1919년 3.1만세운동 참여 후 오신도안정석 등과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2천 4백여 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발하게 활동한 대한애국부인회는 일경에 의해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안경신 의사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와 교섭을 진행시켰습니다

 [사진출처-독립기념관, 타임트리]

아이에게 독립된 나라를 선물해주고 싶다

 이후 100여명의 미국 의원 사찰단이 내한할 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 언론에 호소하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하였습니다. 당시 임신 5개월 째였던 안경신 의사의 거사를 동료들은 만류했지만 아이에게 독립된 나라를 선물해주고 싶다라는 의지로 거사를 진행하였고 안주(安州)에서 검색하는 경찰 1명을 사살 후, 평양으로 들어와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거사 후 함흥으로 피신하여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낳은지 12째인 1921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안경신 의사에 대한 기록과 유족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남아있지 않아 아직까지도 전달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킵니다.


한인애국단의 핵심 - 이화림 선생( 1905.01.06-1999.02.10)

다음으로 소개해 드릴 독립운동가는 이화림 선생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분들은 생소하게 느껴지실텐데요, 이화림 선생은 평양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독립군 이였던 오빠들의 영향으로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성진, 안주 등지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25살의 나이에 상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이 이끌었던 한인 애국단에 가담하여 사격과 무술을 배운 후 일본 밀정들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임시정부의 활동경비를 지원하고 밀정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김구 선생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거사의 숨은 주역이기도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가 있었던 상하이 점령 축하식이 열리기 전날, 윤봉길 의사와 이화림 선생은 부부로 가장하고 기념식이 열렸던 홍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하였습니다. 또한 이봉창 의사의 거사당시 김구 선생의 명을 받고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훈도시(일본식 남자 속옷)을 만들어준 사람 역시 이화림 선생이였습니다.


[사진출처-구글코리아, 동북아 신문]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를 안다면 나를 기억해 주는 것도 마땅하다.“

이렇듯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였지만 테러만으로는 조선의 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김구 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운집한 광저우로 떠나게됩니다. 이후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의학을 공부하며 중국에서 생활하여 국내에서는 잊혀지게 됩니다. 광복후에도 동포들의 의료보건사업과 아동문학 발전에 힘쓰며 중국 대련에서 생활하던 선생은 1992년 향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한국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 선생(1901.01.11-1988.04.19)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독립운동가는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도 잘 알려진 권기옥선생입니다.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 선생은 평양 숭의학교 졸업반 재학 중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여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3주간 구류되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인 김순일, 김정직, 김재덕, 임득삼 등과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 후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도와 평남도청 폭파를 위한 폭탄제조를 도왔습니다. 이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 접선하기위해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합니다.

중국에서 홍도여자중학을 졸업 후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윈난 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고, 1925년 졸업 후 평위샹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로 복무하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경으로 이동한 권기옥 선생은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영어, 일어, 일본인 식별법, 성격 등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사진출처-구글코리아]

"일본 왕궁을 폭격하겠어요-한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

 1943년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애국부인회를 재조직 후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여성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진력하였습니다광복 후 1948년 귀국하여 1950년부터 5년간 국방위원회 전문위원한국 연감발행인한중문화협회 부회장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이에 정부에서는 권기옥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권기옥 선생은 1988년 서울에서 사망하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총 세분의 북한 여성 독립운동가분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통일조국의 독립을 바라셨던 독립운동가분들의 바람대로 하루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독자분들께서도 독립운동가와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다가오는 광복절, 태극기를 게양하며 독립운동가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제9기 대학생기자단 유수연이였습니다.


[내용출처]

두산백과 안경신

동포투데이 윤봉길 신변의 여인- 이화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화림

네이버캐스트 권기옥

두산백과 권기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