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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영화'국제시장'과 이산가족 화상상봉

통일미래의 꿈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난히 추운 겨울 감기 걸리지 않고 잘 지내고 계시죠? 201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원성취와 희망찬 앞날을 기원합니다. 저희는 7기 기자단에서 미모와 웃음을 담당하고 있는 김다애, 박정웅 기자입니다. ^^

 

  최근 영화‘국제시장’이 누적 관객수 천만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이미 관람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다애 기자와 박정웅 기자는 그 속에 있는 이산가족 부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요. 영화 국제시장 안에 있는 이산가족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 영화 포스터△ 가족관계도

영화 국제시장 줄거리(스포일러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 12월 10일 함경북도 흥남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덕수는 막내 동생 막순이를 업고 흥남항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군수물자를 실은 배는 피난민들을 태워주지 않다가 미국 장군의 작전변경으로 모든 피난민을 배에 태웁니다. 덕수는 막순이를 업고 배에 오르는데 결국 마지막에 막순이를 등에서 놓치고 맙니다. 배위에서 울고만 있는 덕수를 발견한 덕수 아버지는 막순이를 다시 찾으러 다시 배에서 내립니다. 그렇게 덕수와 덕수아버지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맙니다. 한편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덕수네 가족은 덕수의 고모가 운영하는‘꽃분이네’를 무작정 찾아갑니다. 그렇게 덕수네 가족은 부산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6.25 전쟁의 끔직한 경험을 했지만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덕수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합니다. 잡일을 하던 덕수는 우연히 신문에서 알게 된 독일 광부 모집에 지원을 하고, 애국심이 충만하다는 이유로 덕수는 독일 광부 모집에 합격을 합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광부로 일하던 덕수는 우연히 강가에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은 덕수는 그녀가 파독 간호사 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의 이름이 영자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영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데이트를 하고 독일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광산에서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서 죽을 목숨이었던 덕수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다친 덕수를 병원에서 정성껏 간호한 영자는 비자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덕수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슬픔을 감추지 못합니다. 한국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덕수는 영자를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덕수의 마음을 알게 된 영자는 무작정 덕수를 덮치게 되고......, 한편 한국으로 돌아온 덕수는 우연히 부산에서 영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자도 간호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데 그 이유는 덕수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사천리로 덕수와 영자는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이후 덕수네 가족은 집도 옮기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덕수의 여동생‘끝순이’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지만 무사히 목숨을 건진 덕수는 목발을 짚고 부산에 복귀하게 됩니다. 힘들게 베트남에서 번 돈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덕수는 흥남에서 잊어버린 자신의 여동생 ‘막순이’ 와 아버지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TV에서 헤어진 가족을 찾아주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보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 흥남철수 영화 이미지 컷

△ 가족을 찾고 있는 덕수

덕수가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이산가족찾기 방송 부분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을 것 같은데요. 덕수는 방송을 통해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났으나 결국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LA 방송국에서 덕수의 여동생인거 같은 사람의 연락이 오게 되고, 덕수는 영상통화를 통해 그 여자가 헤어진 여동생 ‘막순이’ 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덕수네 가족들도 이 소식을 접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 또한 눈시울이 붉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같은 나라에 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각 지역에 있는 방송국을 통해 이산가족을 찾는 장면을 보면서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이산가족 상봉이 잠정 중단된 가운데, 평소 기자단 내에서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박정웅 기자와 김다애 기자의 대화에서 영상매체를 활용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을 하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는데요. 영화 속에 나타난 화상상봉의 역사에 대해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이산가족 화상상봉의 역사

남북이산가족화상상봉센터는 2005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개관하였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은 2005년 6월17일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정한 사안입니다. 그리고 약 두 달 후, 광복절에 남북 각각 20가족의 화상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남북이산가족화상상봉센터는 남측의 경우 서울에 5곳 그리고 인천, 수원, 춘천,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총 12곳에 상봉소가 설치되었으며, 북한의 경우에는 평양에만 10곳이 설치되었습니다.

12일에 열렸던 화상상봉센터 개소식에는 당시 한완상 적십자사총재와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 정동영 통일부 장관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이산가족대표들이 지방 상봉소와의 시연행사도 하였다고 합니다. 

▶화상상봉센터 앞에서 개소를 알리는 테이프 커팅식을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서울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 이산가족 화상상봉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90세 이상의 고령자분들은 거동이 불편하여 직접상봉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시작된 것이 화상상봉이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정동영 장관은 9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 이북의 자식들과 친척을 만났을 때 받을 충격을 대비해 잘 보살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상봉장은 약 6평 규모며 51인치 화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화면을 통해서 남과 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당시 정부는 남북 광케이블을 연결했습니다. 1948년 단절됐던 개성-문산간 통신망을 재연결했던 것인데요. 12코어 중 4코어(155Mbps 급)를 화상상봉 전용으로 사용했었다고 하는데요. 이 수치는 80여 가족이 TV급 화상통신과 200만 명의 전화통화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규모라고 합니다.  

△2005년 광복절 첫 화상상봉 당시 모습.

2005년 8월 15일, 광복절에 처음 시행된 화상상봉에는 남측과 북측에서 각각 20가족씩 모두 40가족이 모니터를 통해 상봉하였습니다. 이 날 8시부터 시작된 화상상봉에서는 남북에서 각각 20가족씩 모두 40가족이 오후 6시까지 상봉시간은 각각 최대 2시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총 일곱 차례의 화상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제1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8월 15일

제2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11월 24일 ~ 11월 25일

제3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년 12월 8일 ~ 12월 9일

제4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6년 2월 27일 ~ 2월 28일

제5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3월 27일 ~ 3월 30일

제6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8월 13일 ~ 8월 15일

제7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7년 11월 14일 ~11월 15일

이산가족상봉행사 때 그들이 흘리는 그리움과 반가움의 눈물을 스치면서라도 보신 분이라면, 또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동생 막순이를 화면을 통해 다시 찾게 되었을 때의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짠한 마음을 가지셨던 분이라면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실 수는 없을 겁니다. 남북관계 악화로 인하여 직접상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직접이 어렵다면 화상으로나마 남아계시는 이산가족 분들에게 가족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북한 주민들이 경제력의 격차를 직접적으로 느낄 것을 염려해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꺼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북분단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된 이들에게 가족을 볼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은 연락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개인적인 접촉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정부의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만남 혹은 연락은 최대한 많이 가능해 져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보고 싶은 가족을 마음껏 볼 수 있고, 그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날까지 정부 관계자와 민간단체, 국민여론 모두가 힘을 합치기를 당부하며 지금까지 통일부대학생기자단 7기 김다애, 박정웅이었습니다.

 

    <출처>


사진제공 -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02875 (영화국제시장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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