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천리마 축구단(The Game Of Their Lives)

 



 

 

 

 

천리마 축구단

The Game Of Their Lives


다큐멘터리, 영국, 80분, 2005

다니엘 고든 감독

폴 니콜슨, 에우제비오, 김일성, 엘리자베스 2세 등 출연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기 월드컵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사건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세계적 축구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이뤄낸 당시 북한 축구단의 후일담을 담은 다큐멘터리. BBC가 공동 제작한 이 다큐는 지구상 가장 폐쇄적인 공산국가인 북한의 새로운 면모를 공정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는 경이로운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유수의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되어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월드컵] 66년 北 사다리축구 '8강 신화'


1954년 스위스월드컵서 한국이 아시아대표로 월드컵 문을 처음 두드린 이후 동양 축구가 가장 빛나는 성과를 거둔 월드컵은 66년 잉글랜드 대회(8회)였다. 아시아 대표로 출전한 북한은 이탈리아 칠레 소련 등 죽음의 4조에 편성돼 누구도 동양의 복병을 주목하지 않았다.


소련과의 첫 경기에서 0-3으로 패한 북한은 칠레에 0-1로 뒤지던 후반 종료직전 박성진의 동점골로 예선탈락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북한의 3차전상대는 두 차례 우승컵을 안았던 이탈리아. 1승1패의 이탈리아는 북한을마냥 깔보았다. 리베라, 마졸라를 핵으로 전반 초반 쉴 새 없이 북한 진영을 유린한 이탈리아는 수비수 불가렐리가 전반 30여분께 백태클을 시도하다 부상을 당해 퇴장해야 했다.


북한은 이후 박두익 함봉진 등 5명의 공격수가 일자(一字)대형으로 상대수비를 교란하는 사다리전법으로 빗장수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전반41분 박두익이 문전혼전중 흘러나온 볼을 논스톱으로 때린 슛이 오른쪽 그물을 흔들었다.


후반들어 이탈리아는 선수 대부분이 걸어다닐만큼 체력저하가 심했고 북한은 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스피디한 공격축구로 경기를 지배했다. 이날승리는 기적이기 보다 세계정상에 가까웠던 북한축구의 진면목이었다.


북한은 여세를 몰아 포루투갈과의 8강전에서 경기시작 53초만에 박성진이선취점을 얻는 등 전반 25분동안 3골을 몰아넣는 믿기지 않는 공격축구의진수를 선보였다. 하지만 에우제비우에 전ㆍ후반 4골을 내주며 3-5로 석패, 북한축구의 신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당시 북한축구는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토털사커에 비견되는 공격축구로 세계축구사의 이변을 창출한 것으로평가받고 있다.


북한의 8강신화 이후 이란(11회) 쿠웨이트(12회) 한국(13~16회)이 월드컵철문을 두드렸지만 아시아축구는 1승조차 거두지 못한 채 물러서야 했다.


오일달러로 급부상한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과 함께 출전한 94년 미국대회(14회)서 벨기에 모로코를 꺾으며 2승1패의 성적으로 28년 만에 본선 2라운드(16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스웨덴에 1-3으로 무릎을꿇어 8강 문턱에서 좌절했다.


2002.6.4. 한국일보.


 

 

 

 

    

 

 


북한 66년 월드컵 주역들의 현주소


지난 66년 잉글랜드월드컵대회에서 이탈리아를꺾고 8강에 진출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당시 북한팀의 주역들이 한때 알려졌던 것처럼 투옥되지는 않았으며 평양시내에서 잘살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 타임스가 21일보도했다.


이 신문은 영국의 TV프로듀서 댄 고든씨가 4년간 평양의 관계자들을 설득한 끝에 지난해 박두익씨를 비롯한 당시 주역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게됐다고 전했다.


지난해 카메라를 들고 북한에 들어가 당시 선수로 현재 생존해있는 7명과 당시감독의 이야기를 담은 `일생일대의 경기'라는 영화를 제작한 고든씨는 이들이 "평양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으며 투옥됐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팀 선수들은 우승하지 못한데다 대회기간에 여자와 사귀고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투옥됐던 것으로 한때 알려졌었다고 신문은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그들은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월드컵대회에서 거둔성적의 대가로 모두 나라에서 주는 아파트를 받았으며 그들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사실 자체가 이를 웅변하는 것"이라고 고든씨는 말했다.


당시 선수로 뛴 사람들은 모두 체육의 거리에 있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으며 박두익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2층짜리 아파트에 승용차도 가지고 있었다고그는 전했다.


박씨는 여러해동안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왼쪽 날개공격수였던 양송국씨는 평양담배공장근로자축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고 골키퍼였던 리찬명씨는 육군팀을이끌고 있다고 고든씨는 말하고 이들은 외국 TV촬영팀이 자신들을 추적해 찾아온데대해 놀랐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아직도 모두 국가적 영웅들이지만 자신들이 외국에서도 잊혀지지 않았다는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 당시 미드필더였던 한봉진씨는 우리에게 달려와 자신은영국인들을 사랑했으며 66년 당시 이후 영국인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경기가 열렸던 영국 미들스버러시의 시장이 아직 살아있는지 물었으며 그가 별세했다고 말하자 매우 슬퍼했다"고 고든씨는 말했다.


이들은 당시 미들스버러 시민들과 시장의 환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고든씨는 말했다.


"우리는 영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영국을 적으로 생각했으나 미들스버러 시민들은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영국 땅에 우리 국기가휘날릴 것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었다. 미들스버러 시민들의 태도가 우리팀 경기에 영향을 줬다고 확신한다"고 박씨는 영화속에서 말하고 있다.


박씨는 또 "나는 스포츠가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외교관계와 평화를 위한것이라는 사실도 알게됐다"며 자못 고상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고 더 타임스는 말했다.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으며 어땠겠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통일이 돼야 한다.


우리가 단일팀이었으면 우리는 매우 잘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고든씨는 오는 10월 영국 셰필드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당시 주역들을초청하고 이들이 미들스버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타임스는 전했다.


2002.6.21.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