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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간첩의 력사 (1) 개그맨 이수근이 간첩 이름?!



미모의 여간첩, 고정간첩, 이중간첩, 군인간첩, 탈북간첩 등 분단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접두사들이 ‘-간첩과 함께했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활동한다는 댓글간첩까지 간첩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도 했다. 쉽게 과거 50년 전 간첩이 클라크의 산업구조에 따라 1차 산업에 종사했다면, 지금 간첩은 서비스업은 물론 첨단 IT 분야까지 3, 4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까.

구글링으로 과거의 내 모습은 물론 타인의 삶도 스캔하는 시대.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간첩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을까? 주지하고 있는 사실처럼 우리는 오히려 간첩을 가려내는데 과거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다. 누가 알바’이고 누가 간첩인지 모르는 시대이다. 어쩌면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간첩들에게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을지 모른다. 지금 이 글을 어떤 간첩이 카페라떼를 들이키며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어색하지 않기도 하다.  

언어가 사회를 대변해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과거에는 땡땡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했지만 요즘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정치와 사회의 무관심해진 우리 세대보다 오히려 간첩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간첩의 존재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산소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산소라는 표현을 써보니 산소 같은 여자라는 과거 광고 카피 때문인지 간첩에게는 과분한 것 같다. 간첩은 아마 갈등과 대립이라는 산소의 연소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도로 정리하며 간첩의 력사연재 기사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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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3. 22.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판문점에서 유엔사 한국계 직원 제임스 리(이문항)에게 다가와 귀순 의사를 밝혔다. 당시 우리나라와 북한은 경제적 격차도 크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 성장률이 높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그것도 북한 중앙통신 고위직에 있었던 이수근이 귀순 의사를 밝힌 것은 충격과 동시에 체제 경쟁의 열을 올리고 있었던 상황에서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1967년 귀순한 이수근


탈북민이 많지 않았던 당시. 이수근의 귀순은 자유 대한민국의 우월성과 동시에 북한 체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이수근은 귀순용사이며 반공 교육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된 것이다. 귀순 이후 이수근은 극진히 대접 받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체제가 그곳의 체제보다 더 우월하다며 결코 딴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고 확신하게 해주었다.



1967년 장춘단공원에서 열린 이수근 귀순환영대회

그러나 이수근의 귀순용사반공전사라는 직함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675일만에 간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채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한다.


도대체 이수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건은 사이공 공항에서 벌어진다.

귀순 이후 이수근은 막대한 축하금과 당시 1,000만원이 넘는 정착금과 고급 주택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수근이 여권을 위조해 비밀리에 출국했다. 출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수근은 사이공 공항에서 체포된다. 당시 신문들은 이수근이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로 가려 했다고 전하며, 체포 당시 권총을 빼들고 저항했다고 한다.


1969. 2. 1.

간첩 협의로 체포된 이수근이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사형이라는 1심 판결에 이수근이 고등법원에 항소의사를 표현한 상태에서 사형은 속전속결로 집행되었고 이수근 간첩의 역사가 마침표를 찍는 듯 했다.


1969년 재판과정


하지만 그의 간첩의 역사는 사형 집행이 지난 지 정확히 20년 뒤에 계속 이어진다. 1989 3 [월간조선]에 조갑제 기자는 이수근 사건은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이수근 미스터리와 후속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 정보 제한과 반국가사범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제기되는 모든 물음표는 마침표로 사장되었다.

 

2007 1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는 이 사건을 당시 남북한 체제 경쟁으로 개인의 생명권이 박탈당한 대표적인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 유린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상 69년 사법부에 판단을 뒤집고 2008년 이수근에게 무죄를 판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이수근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Rewind

1969

체포 당시 이수근은 홍콩 공항에서 권총을 빼들고 저항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체포 당시 그가 소지했던 물품은 영어사전, 한영사전, 기초영문법, 중국어 교재 등 책 네 권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수근은 왜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북한으로 가려 하지 않고 베트남을 경유해 캄보디아를 가려 했을까? 이 부분은 오직 사자가 된 이수근 밖에 모른다. 하지만 평소 그가 지인들에게 북쪽이 싫어 남쪽에 왔는데, 이곳에 자유가 없다. 차라리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살면서 남북 양쪽에서 체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해 돈을 벌며 살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어쩌면 이수근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의 길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이명준은 남쪽이 싫어서 월북을 했고, 북한의 사회주의도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쟁 포로 석방 후 남과 북도 아닌 망명자 신분으로 제3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자살을 선택하며, 소설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간첩 이수근은 개그맨 이수근과 이름이 같다. 실제 개그맨 이수근의 아버지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아들 이름을 수근으로 지은 이유가 당시 귀순용사 이수근만큼 용감하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용감한 반공전사 이수근은 2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끝으로 30년 간 위장간첩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이제라도 이수근이라는 이름이 위장간첩에서 다시 원래 용감함으로 돌아간 것을 반기며 간첩의 력사첫 번째 기사를 마친다. 




사진 참고

http://blog.naver.com/razzoqkr?Redirect=Log&logNo=20135459286

KBS 승승장구 (1월 31일 방송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