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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통일 선배, 독일의 중심에서 통일을 느끼다 (1) 베를린과 연방 내무부

혹시 올해 통일부 업무보고에 대한 기사를 읽으신적이 있으신가요?? 올해 통일부 업무보고 중에 맨 마지막 부분에 독일경험 체계적 공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22년전 먼저 통일이 된 국가로 현재는 우리나라와 통일에 대한 의견 교환을 통해 더 나은 통일환경 조성을 위해 협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2011년 11월 18일날 진행되었던 독일통일 교훈을 공유하고자 실시된「2011 한반도비전포럼」비전大강연 을 기억하신가요?? 강연을 듣고 소감문을 쓴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수 소감문 입상자에 대해서는 독일통일연수기회를 부여하는 큰 혜택이 있었는데 제가 운좋게 뽑혀서 기자단에서는 저 혼자 선정되어 연수기회를 부여 받았습니다.


연수단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예전 동독지방이지만 지금은 작센 주의 주도인 드레스덴 그리고 우리에게는 2006년 월드컵 한국 대 프랑스가 열린 곳으로 기억되는 라이프치히를 방문하였습니다. 

독일은 누구나 알듯이 1990년에 통일되었습니다. 통일을 이룬 국가 중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국가로서 이번 독일통일연수는 독일통일 역사의 현장을 방문함으로써 독일통일이 한반도통일에 갖는 시사점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번 독일 통일을 느끼다 기사는 1,2,3편으로 구성되는데 1,2,3편 중 1편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와  체크포인트찰리, 연방 내무부 견학 내용, 2편은 브란덴부르크문, 체칠리엔호프궁 그리고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부 교수이신 페니히 박사와 함께 한 “독일과 한국의 비교 및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제언”에 대한 강의 내용, 마지막 3번째는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방문하고 독일 연수를 끝나면서 느낀점에 대해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베를린 시내를 다니다보면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베를린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통일 독일의 수도로 동서독이 분단되었을 시기에는 절반으로 나눠져 분단의 상징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분단시절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는 베를린은 문화재 보존을 잘하여 도시전체가 박물관 같았습니다. 베를린의 분단과 통일에 관련한 문화재 중 특별히 엄선하여 연수단이 간 곳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체크포인트찰리, 브란덴부르크문, 그리고 베를린 근처에 있는 체칠리엔호프 궁이었습니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는 베를린 슈프레 강 옆 오스트반호프(Ostbahnhof)역 부근에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1990년에 베를린 장벽 중 남아있는 1.3Km 구간에 세계 21개국 118명의 작가들이 그림을 그려 하나의 갤러리를 만들었습니다.
 


저의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작품 중간중간마다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한글로 남긴 글자들을 많이 본 것입니다. 전 그 글씨를 보면서 우리가 통일에 무관심하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스트사이드갤러리에 남긴 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자칫 흉물스럽게 남을 수 있는 베를린 장벽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으로 만들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였습니다. 저희가 간 날도 저희 옆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저희 옆에서 관광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그래피티, 비, 바람 등으로 훼손된 것을 보수하여 2009년 11월 6일에 다시 선보였습니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를 뒤로 하고 다음으로 간 곳은 체크포인트 찰리였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분단하고 있던 베를린 장벽에는 8개의 국경검문소가 중 하나로서 미군이 관리하던 검문소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1961년부터 통일 독일이 된 1990년 사이에 연합군과 외국인, 외교관, 여행객들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드나들 수 있었던 유일한 검문소였는데 이곳에서는 주요 업무 서독의 연합군이 동독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록하고, 동독에서 체류지를 조사하였습니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크포인트 찰리는 1990년 10월까지 계속 공식 검문소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감시 초소는 제거되어 연합군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야외 전시장에서 계속 전시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검문소로 불리는 곳에는 복제품 초소가 있으며 검문소 바로 옆에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벽박물관(Haus am Checkpoint Charlie)이 있습니다. 벽박물관은 이전에 감시병 막사로 이용하던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꾼 것입니다. 

Checkpoint Charlie라는 이름에 Charlie라는 이름에 큰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NATO에서 부여한 음성 기호로 A는 알파(Alfa), B는 브라보(Bravo) C는 찰리(Charlie), D는(Delda)등으로 불러서 체크포인트 찰리는 체크포인트 C이므로 체크포인트 3번째 생각하면 됩니다.



연수단은 지금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베를린 지역이 예전에는 지금과 같이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통일이 가져온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통일 후에 우리가 체크포인트찰리처럼 박물관 같은 곳을 할 수 있는 곳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판문점 지역을 생각했습니다. 판문점은 현재 공식적으로 남북을 이어주는 곳으로 남북한 주요 실무회의가 진행되는 곳이도 합니다. 얼마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문 갈 때도 우리측 인원들이 판문점을 통해 지나갔었는데 가장 공식적인 창구인 만큼 통일 이후 판문점을 해체하는 것보다는 체크포인트 찰리와 같이 교육장소로 바꾸어 분단의 비극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체크포인트찰리를 떠나 점심을 먹고 바로 연방 내무부를 찾았습니다. 연방 내무부 방문은 "독일통일 21년 동독 재건에 있어서 연방 내무부의 역할" 주제의 강의를 듣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쿠어트(Eberhard Kuhrt) 재건팀 과장, 폽(Michael Popp) 정책팀 담당자의 환영으로 시작했습니다. 진행순서는 쿠어트 과장 인사말씀 - 폽 담당자 강연 - 질의응답으로 이뤄졌습니다.

 

쿠어트 과장의 인사말
 
최근 한국의 통일부와 독일의 연방 내무부 사이에도 많은 교류가 일어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독일의 관계가 더욱 더 좋아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예전에 비해 한국 방문객들을 많이 맞이하고 있는데 통일부를 통한 협력 일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양국간 협력을 강화한지 1년이 이미 지났는데, 통일부와 내무부 사이에 통일에 관한 양해협력각서를 체결하기도 하여서 지난 11월에 서울에서‘한· 독 통일 자문위원회’개최식에 내무부 관련자들 함께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인사말에 이어서 바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1990년 이후 경제 발전, 1990년 이후 노동시장의 성장, 동독을 위한 재정 지원, 인구학적 변화, 동독의 인구학적 전략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1990년 이후 경제 발전
 
동독의 도시 당 GDP는 1991년과 비교 했을 때, 서독의 약 33%에서 현재는 서독의 73%까지 성장하였다고 밝히면서 동독의 경제구조는 중소기업이 지배하는 형태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동독의 생활수준은 지난 20년 간 서독과 비교하여 최소 약 33%에서 현재는 거의 80%까지 급격하게 성장하였는데 서독은 비용을 지불하고 동독은 받기만 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서독 동독 그리고 전 유럽이 통일로 인해 이득을 봤는데 동독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에서 교역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서유럽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되었고, 동유럽은 그에 따라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1990년 이후 노동시장의 성장
 
신탁관리공사를 통한 엄청난 국유재산의 민영화로 인해 몇 개의 직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민영화로 인해 약 250만 개의 직업이 사라졌지만 동시에 150만 개의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습니다. 연방 정부는 높은 실업률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2003년까지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2003년 동독은 전환점을 맞이하여 그 이후 실업률은 급격하게 감소하였습니다. 2011년 11월 현재 동독의 실업률은 1991년 이후 최저치인 10.2%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 서독의 실업률인 5.5%에 약 두 배 가량 높은 수치이며, 게다가 장기 실업률은 서독보다 항상 높습니다.


동독을 위한 재정 지원
 
우선 연대협정이란? 독일에서 통일 후 나타난 물가상승 등 경제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시키면서 등장한 용어
 
▶ 연대협정Ⅱ 
동독을 위한 지원은 2019년까지 연대 협정Ⅱ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5년부터 2019년까지 1560억 유로를 지원할 계획인데 새로운 연방 주들에 1050억 유로를 직접적으로 지원할 예정입니다. 연방정부 예산으로부터 510억 유로에 비례하는 지원을 새로운 연방 주들에 지급합니다.
 
▶ EU의 구조기금과 공동농업정책
EU구조기금으로부터 180억 유로 이상과 공동농업정책으로부터 약 50억 유로가 2007년부터 2013년 사이에 동독에 지급될 것입니다. 변두리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이는 매우 크고 경쟁력 있는 산업입니다.
 
▶ 기본 운영 계획 
새 연방주들의 지역 경제구조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지원입니다. 사회기반시설과 투자 수단이 아닌 것의 성장을 위한 영리적 투자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동독은 128억 유로를 지원 받았고 약 683억 유로의 투자가 발생하였습니다.
 
▶ 보충 지급
기업, 산업 그리고 서비스의 기본 투자를 지원하는데 2013년에 끝날 예정입니다.


인구학적 변화
 
동독의 인구는 1990년 이후로 줄어들고 있고 동시에 점점 노령화되고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느데 1990년 이후 동독의 인구는 약 9.5%가량 감소되었습니다. 전체 인구 중에 65세가 넘는 인구가 22.4%에서 35,6%로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통일 이후 매우 낮은 출산율, 높아지는 기대수명 그리고 인구 구조 때문입니다. 통일 과정에서 젊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불확실 때문에 아이들을 갖지 않아 출생률이 많이 낮아 졌는데 그 큰 원인은 많은 젊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서독으로 대거 이주하였기 때문입니다. 2008년 이후 다시 동독의 출생률이 서독 을 넘어섰지만, 아직은 동독에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합니다. 통일 이후에 점차 평균수명이 증가하 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결과임을 보여주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동독의 인구학적 전략
 
동독에 현재 거주하고 있고 또한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유인할 방법을 창안 하고 있는데 미래 발전을 위한 기본은 모든 지역의 특정한 잠재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개인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들과 전략 개발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외 지역의 조건과 문제들은 도시와는 다르므로 별개의 전략들이 세워져야만 합니다. 핵심 전략은 떨어진 지역이라도 혁신적인 생각(기술적 혁신, 대안적인 공급 그리고 유동적인 해결책 등)을 통해서 공공 서비스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질의응답
 
(질문1) 독일 통일 당시 동독주민들의 시위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고프바초프의 집권이 얼마나 지속될지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급진적인 통일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북한의 체제가 당시 동독처럼 위태롭다면 한반도 또한 급진적인 통일을 할 수도 있지만 북한 체제가 위험해질 때까지 통일을 미루기 보단 여러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점진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답변) 급진적 통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장벽의 붕괴는 급진적인 통일을 가져왔습니다. 독일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정세가 어려웠는데, 예를 들어 소련이 통일에 동의할지 안 할지 아무도 몰랐고, 서방 국가들이 독일의 재통합을 용인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국경을 열자 모든 사람들이 다 서독으로 가게 되는 등 되돌아보면 통일 후 2~3년은 힘들었습니다. 다시 동독의 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동독과 서독보다 훨씬 차이가 크고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는 없지만 많은 전략들을 짠다고 해도, 실제로 어떻게 통일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독일 통일처럼 한 번에 이루어지는 통일이 좋지 않다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지만, 통일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할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독일의 통일이 그간의 모든 고통을 보상하는 통일이라 생각하는데 북한은 점진적인 단계를 걸쳐 개방되어야 하는데 각 단계마다 굉장히 다양한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기에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2) 분단된 국가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지녔기에 많은 면에서 통일 후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특히 교육은 나라의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통일 후 독일의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하다.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통일 후에 어떻게 통합되었는가?

(답변)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하나의 통일 된 연방 교육 제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일은 연방국가이므로 각 연방 주마다 다른 교육 철학과 시스템 갖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한 문제이고, 통합이 쉽지 않습니다. 동독에는 예전부터 교사였던 교사들이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은 달라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동독에서 행해지던 정치 수업이나 역사 수업은 버려지고 통일 후의 시대를 위해 교과서의 새로운 내용들이 실렸는데, 동독에서 가르치지 않던 역사 관점들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많은 수의 동독 학교 교사들은 1945년 이후의 독일에 대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교육 시스템은 오늘날 중요한 이슈이고, 많은 부모와 학생들이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질문3) (강연자가 학생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의 통일을 원할꺼 같습니까?
 
(학생 답변) 사실 아는 바가 많이 없다. 고난의 행군 시기처럼 북한이 어려울 때는 통일해서 남한처럼 잘 살게 되기를 원했지만, 최근에는 장마당 등 암시장이 활발해지면서 북한주민들도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어려울 때 우리보다 오히려 중국이 도와줌으로써 남한과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연자 답변) 통일부와의 협력을 통해서 독일 통일 연구에 관련된 정보 공유를 해오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떤 부분이 유사하고 어떤 부분이 차이가 있는지, 당시의 독일이 지금의 한국과 얼마나 다른지 파악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통일 당시의 독일은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몰랐습니다. 물류 교류가 있었고 문화 분야 특히 체육, 스포츠에 있어서 왕래가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서독은 너무나 동독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관계정상화 덕분에 동독에서 제도나 자본이 필요하다고 요청을 했을 때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채널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폽 담당자의 마무리 말씀

한국은 양국 관계가 굉장히 경직이 되어있는데, 북한 주민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고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우리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지 정보를 찾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북한은 형제 그 이상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분야 보다 사회적인 양상에 중점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북한 주민들은 독립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통일 후에 큰 차이점이자 문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 통일 이후 21년간 성장과 어려움 그리고 미래까지,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오가면서 서로 영어를 사용하면서 통역 없이 열심히 통일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독일이 느꼈던 어려움을 우리가 느끼지 않을려면 더욱 노력 하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독일을 느끼다 1편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2부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자유베를린대학교 명예교수인 페니히 박사의 강의 그리고 포츠담 선언 장소로 유명한 체칠히엔호프궁을 찾은 뒤 느낀점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2편도 기대 많이해 주세요^^